그곳에서 다시 만날 나의 형제님

현정숙 간호사0

중앙병원 호스피스 병동0

'호스피스' 이곳에서 나누는 이야기는 가슴저린 슬픔과 사랑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에게 주

어진 시간만큼이나 소중하고 절제된 언어들을 서로 주고 받기 때문일 것이다.

52세. 남. 후두암. 황ㅇ영님.

이분 역시 그러했다. 특히 이분은 처음 입원시부터 발음이 정확치 않아 종이메모로 의사표현을 했기 때문에 메

모지에 쓰여진 말한마디는 곧 이분의 가장 중심적 마음이었다.

진통을 참으면서 써야 하는 글이기에 가끔 은 맞춤법도 틀리고, 글씨가 겹쳐져서 잘 알아 볼 수도 없을 때가 많

았다. 처음 그곳에 쓰이는 대부분의 말은 '주사'였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치료에 대한 질문들.....

아저씨는 무척 꼼꼼하시고 완벽한 분이셨다. 진통제투여 간격을 체크할 정도로...

그러던 어느날부터 아저씨의 메모는 달라졌다. 자신의 대한 문제보다는 천국에 대한 메모가 많아졌으며 감사의

제목들로 바뀌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주시는 참 평안을 얻은 것이다.

99년 2월 7일

이제 봄이 오려는 것일까?마지막 추위가 창문가에 가득히 쌓였다. 한 남자 환자분의 입실이 있었다.

그분은 후두암으로 왼쪽 목옆으로 혹이 불거져나와 두통과 상처의 통증이 심했다.

목은 기관지 절개수술을 받아구멍이 나 있다. 아저씨가 잠시도 그곳에서 신경을 놓지 않는듯이 보인다

99년 3월 23일

새벽 1시에 20분 ..여전히 불이 켜져있다. 진통제를 놔 드리고 먹는 진통제도 드렸는데 다시 진통제

를 놔 달라고 하신다. 인후암은 암청난 고통 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도와줄 것이 없다는

것이 새삼 가슴을 저며온다.

99년 3월 25일

봉사자 두 분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앞자리에 권ㅇ직아저씨 다리를 맛사지를 하고 있다.

진통제를 주사하고, 혹시나 해서" 아저씨도 다리를 주물러 달라고 할까요?"

하고 물으니 웃으면서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괜찮다는 뜻인 줄 알고 가려고 하니 두 다리를 이불밖으로 쭉 내 놓

으신다. 내가 봉사자분께"우리 아저씨 다리도 안마해 주세요"

하니 한 분이 웃으며 봉사해 주셨다. 아저씨가 말씀은 못하셨지만 하고 싶으셨나 보다.

99년 3월 28일

이제는 아주머니가 계속 아저씨의 곁을 지키시게 되었다. 통증이 심해지고 식사도 거의 못하는 상태 이지만 더

이상 아저씨가 외로워하지는 않을것 같다.

어미 제비가 둥지안의 아기 제비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듯이 하나님은 아저씨에게 하나 둘씩 선물을 보여 주시

기 시작하고 계셨다.

99년 3월 29일

내가 병실로 들어서는 순간 아저씨는 무엇이 목구멍에 걸렸는지 힘들어 하셨다.

"가래가 목구멍에 걸려 있는 것 같아요" 라고 종이에 적어 주셨다.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1004같아요" 라는 메모와 함께...

그 방에서 기구를 이용하여 가래를 흡입하려 하는데 아저씨께서 시끄럽게해서 다른 환자분의 잠을 깨울까봐 밖

에서 하기를 원하신다.

간호사실로 모셔와 가래를 뺏으나 너무 깊이 있어서인지 별로 나오는 것이 없었다. 그 후 조금은 편안한 상태가

되어 자리에 가서 엎드려 계셨다.

99년 3월 31일

아저씨가 오늘 세례를 받으셨다. 몸이 아프셔서 신앙을 갖기 시작했지만, 마음과 입술로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

하는 날, 아저씨 부인께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셨다.

아마도 아주머니의 오랫동안 기도제목이 아니였을까?

99년 4월 30일

눈으로 보인는 암덩어리가 감당하기 힘드신 것 같다. 너무 아프셔서 치료하기도 거부하신다.

머리가 아프셔서 얼음 수건으로 감싸고 계신다. 하지만 예배 시간에 참석하시려는 열심을 보면서,오늘은 내가

아저씨의 든든한 친구가 되어 드리고져 옆에 앉았다. 그런 내게 아저씨가 베개를 밀어 주신다. 성경책을 놓고

보라는 것이다. 꼭 오빠처럼...

99년 5월 1일

새벽 1시 15분, 아저씨가 평안한 모습으로 누워서 주무신다. 저런 모습은 처음이다. 매일 엎드려 주무시고 그렇

지 않을 때는 거의 앉아 있다시피 했는데..

그의 옆에서 아주머니가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를 드리고 있다. 아주머니는 병원에 오신날부터 기도를 쉬지

않고 하신다. 아저씨를 안마하면서도, 씻으면서 계속 조그마한 소리로 기도하신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듯이...

99년 5월 15일

목에 하나 둘 있었던 혹 덩어리들이 이제는 커다랗게 얼기설기 이어졌다. 어느새 자랐을까?

나의 표정이 변했다. 아파 보인다. 하지만 아저씨는의외로 평안한 얼굴이다.

아저씨가 어느새 이렇게 변했을까?.. 요즈음 아저씨는 거의 누워서 주무신다. 몇 개월간 눕지를 못해 거의 엎드

려서 졸다시피 주무셨는데..

99년 6월 12일

얼키고 설킨 암덩어리에서 출혈이 되더니 멈출 줄을 모른다. 아무래도 혈관 주위에 암덩어리가 생겨 혈관이 터

진 것 같다. 빨리 지혈을 시키고 테이프로 고정했다.

오늘도 황형제님의 부인은 찬송을 목이 메이도록 열심히 부른다. 어느새 나의 입술에서도 찬송이 나오기 시작

했다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 우리의 모든 짐을 내려놓습니다. 우리를 받아 주소서.

99년 6월 18일

아저씨가 주무신다. 일부러 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옆에서 아저씨의 숨소리를 하나 둘 세어본다. 기관지

절개술을 받아 목에 난 구멍으로 숨을 쉰다. 아내가 이불을 꼬옥 덮어 드린다.

목에 난 구멍까지.....

99년 6월 19일

아저씨가 평안히 누워 계신다. 칠판에 매직으로 뭔가를 쓰려고 하는데 도저히 무슨 글씨인지를 알아 볼 수가 없

다.그래서 대충 추측해서 말해본다. 이마에 손을 얹고 있어서 "머리 아프세요?"

라고 말해 보지만 표정은 평안해 보인다. "베개가 낮으세요?" 라고 말하고 베개를 하나 더 올려 주니 조금 만족

해 하신다.

이제 아저씨는 눈이 마주쳐도 주사 달라는 말씀도 없으시다. 오히려 내가 주사 안 맞아도 되겠느냐고 물어보면,

괜찮다고 하신다. 하나님이 평안의 날개로 감싸 안으신 것일까?

오늘은 아저씨 혈압이 60/40 이다. 몇 달 동안 못 보시던 대변도 보신다. 이제는 아저씨도 천국갈 준비를 하시

나보다. 병실에서 찬송가가 계속 울린다. 가족들이 모두 모였다. 서로 보둥켜안고 울기도 하시고 웃기도 하신다

그 동안 짧은 여정가운데 쓰여진 기나긴 이야기들 때문이리라.. 하나님은 이러한 과정속에서 마지막 정리를 시

키고 계셨다.

99년 6월 26일 새벽

새벽 2시가 못 되서 아저씨는 하나님 품으로 가셨다. 광야를 헤메이는 듯한 고달픈 이 세상에서의 삶을 청산하

고 이제는 고통도 외로움도 갈등도 없는 영원한 안식의 자리. 그토록 사모하시던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신 것

이다.

99년 12월 31일

아플 때 기도가 무슨 소용이냐고 하시던 아저씨. 그래서 진통제만 더욱 의지하셨던 아저씨. 그런 아저씨가 어느

날부터인가 부인께,목사님께 기도를 부탁할 만큼 달라지셨을 때 저희들은 놀랬습니다.

아저씨!

아저씨를 떠나보낸 시간이 벌써 반년이 되었어요. 항상 병실에 들어가면 웃으면서 손을 들어 반겨주셨죠.

우리들이 힘들까봐 욕창치료도 안하겠다고 할 정도로...

시간이 흪러 세월이 지나가도 아저씨를 잊지 못할것 같습니다. 저희들이 아저씨를 잊지 못할 것은 또 하나가 있

습니다. 그것은 아주머니께서 자원봉사자로 계속 그 자리에 남으셔서 고통하고 절망하는다른 환우들을 보살펴

드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 계산으로는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저씨, 아주머니 사랑해요.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르니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 시는 주님의 말씀을 받들어 저희들은 항상 깨어있는

정신으로 우리 환우분들과 함께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