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형석 집사(수필가)0
제 4기 자원봉사자0
 
' 한 몸으로 뭘 할 수 있으랴 주저 하기도 했지만 마음 하나만 가지고 호스피스 자원봉사자가 되었다. 죽음을 지
척에 두고 있는 환우들을 제대로 돕지 못하는 아쉬움을 메우기라도 하듯 시간을 내어 자주 호스피스 병동을 찾
는다.
 
내가 '현'씨를 처음 만난것은 5월 중순의 금요일 밤이었다.
어둡고 초췌한 얼굴은 그가 간암 말기 환자임을 금방 알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 그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
이란 그의 팔다리를 주물러주며 말동무가 되는 것뿐. 그렇지않아도 현씨는 잠이 오지않는 다며 말동무하자고
나를 불렀던지라 마침 잘 됐다싶었다. 선교회 소속 사백여명의 호스피스 봉사자 가운데 남자는 손가락으로 꼽
을 수 있을 정도다.
 
더욱이 현씨와는 비슷한 연배여서 대화상대로는 제격인 셈이다.
그 무렵 걸음을 옮길 때마다 고관절에 통증이 오는터라 목발에 의지해 다녔고 그날도 목발을 짚고갔다. 대화를
시작하며 그는, 불편한 몸으로도 이런 일을 한다며 나를 대견스러워했고, 건강할때 남을 위해 봉사할 줄 모르는
한심한 사람이 었노라 얘기해 주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몇번이고 내게 고맙다 했다. 오히려 내가 쑥스러울 지경이었다. 전에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
았다는 그는 입원한지 한 주일이 지나며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열기 시작하는 참이었다.
누군가에게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은 언제봐도 아름다운 것. 그렇게 마음이 열린 사람과의 대화는 편안하기 그지
없다. 십년지기라도 되는 양 스스럼이 없었다. 밤을 새워도 좋을 것 같은 분위기.
 
하기야 나는 밤샐 작정을 하고 갔으니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몇마디 하지도 못하고 그날 현씨와의 대화를 접어야 했다. 두 남자의 애기소리가 어렵사리 잠을 청하려
는 같은방 환우들을 신경쓰이게 했나보다.
늘 통증 속에서 지내는 환우들이 그나마 통증을 잊고 쉴 수 있는 수면을 방해 할수는 없지..
그 다음주 수요일, 호스피스 병동을 찾아가보니 그는 복도 건너편 병실로 옮겨 있었다. 내가 그 ㅇ 호실을 노크
했을때는 마침 그는 환의를 갈아입는 중이어서 문밖으로 내가왔단 사실만 알렸다. 닷새전에 단 한번 만나 십여
분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그는 목소리만 듣고도 내가 누군지 알겠노라 했다. 다른 병실부터 들렀다가 ㅇ호실로
갔다.
 
현씨는 힘이없는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으며 반가워했다. 그 손은 따뜻하고 포근했다. 그가 옮긴곳은 2인실이었
는데, 전에 있던 6인실보다 조용해서 잠이 잘온다고 좋아했다. 하지만 그곳은 '임종 대기실'로 쓰는 방이다.
이틀후, 다시 현씨를 만나러 가보니 그의 표정은 더없이 평안해 보였다. 안색이 몰라보게 밝다. 그날 세례를 받
았다고했다. 게다가 그날 저녁엔 젊은 봉사자들이 발을 씻겨주기까지 했으니 현씨는 심신 모두 편했나보다. 그
날 저녁 그의 소변량은 200cc! 평소에 하루 소변량을 합해도 고작 150cc이던 사람이. 당장 이틀전만 해도 소변
을 보려고 옆으로 누워 안간힘을 쓰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빈소변통을 놓아버리던 그였는데,. 얼마나 개운했
으면...
 
그 다음주 수요일, 밝게 인사하며 현씨의 병실에 들어섰다가 잠시 머쓱했다. 그는 의식이 가물가물 한 상태였고
,얼굴엔 산소마스크가 씌워져 있었다. 살며시 그의 손을 잡으며 "나 누군지 알지?"
물으니,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만히 내손을 잡는다. 그렇게 손만잡고 몇분동안 침묵이 흘렀다. 문득 J와 작별
하던 20년전이 생각났다. 꼬박 여섯해 동안 주위 친구들이 시샘할 만큼 다정했던 J와 의 마지막 만남. 그때도
지금처럼 말없이 손만 마주잡고 한참을 있었는데... 그러나 그때도 지금도 말없이 마주잡은 손으로는 백마디 속
삭임보다 더 진한 마음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달변이나 미사어구보다 침묵의 귀중함을 절감할 때가 종
종 있다. 말주변이 없다보니 그럴때가 편하다.'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 는데 더 값진것을 소유한다는 뿌
듯함 때문일까?
 
숨쉬는 것조차 힘이 드는지 현씨는 숨쉴때마다 얼굴과 목울대가 일그러졌다. 얼굴에선 땀이 솟고, 곁에 앉은 그
의 아내는 남편 얼굴의 땀을 닦아주며 자신의 눈물을 훔쳐낸다.
중학 2학년의 딸과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은 병실에서 밤샐 준비를 하고 잠시 후면 올거란다. 선친이 교통사고
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임종조차 하지못한 나로서는 그런 그들이 부럽기도 했다. 침묵으로만 일관하기가 뭣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누라랑 아이들 뒷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맘편히 가"
현씨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사람의 의식이 끊어질 때는 청력이 마지막까지 남는다고 한다. 혼수상태
에서 의식이 돌아올때는 그 반대의 청력이 가장 먼저 살아나고,그러니 숨이 끊어진 것 같다해서 함부로 비방하
지는 말 일이다. 절명한 듯 보이는 사람이 격분하여 벌떡 일어날 수도있으니까..
밤 새워 그의 마지막 가는 길에 말동무가 돼주고 싶었느나 어쩔 수 없이 병실을 나서며 한마디 덧붙인다. " 잘가
. 그리고 나중에 내가 가면 모른체하지마" 현씨는 또 끄덕끄덕. 이번에 눈물을 주르르 흘린다. 그 눈물을 보니
목이 메어온다. 그도 그랬을 것이다.
 
병실을 나서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잠들기 전에 현씨생각 뿐이었다. " 오늘 밤을 넘길 수 있을까?"
다음날 아침 담당 간사님의 출근 시간이 되자마자 전화를 걸어 현씨의 안부를 물었다.
"오늘 새벽에 소천하셨어요. 아주 편안히 가셨어요."
간사님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려있다.
'현씨 편히 갔구먼' 혼자 중얼거려본다. 서울로 향하는 양볼에 깊게 주름진 현씨의 얼굴이 맞은편 창에서 계속
따라오고 있었다.
[수필공간] 송현수필문학회,(서울: 선우미디어, 2001)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