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전 즈음으로 기억한다.

회진을 돌 때마다 선한 웃음을 지으시며 부부 내외가 자신의 건강보다는 나의 피곤함을 더 걱정해 주셨던, 그런 정이 많으셨던 70대 환자분이 돌아가셨다.

돌아가신 이후 한동안 회진을 돌 때마다 그분의 생전 모습이 종종 생각나곤 하였다.

혈액종양내과 의사로 15년을 지내오며 타인의 죽음은 이미 하나의 일상이 됐기에, 일반인에게는 별로 이상할 것 같지 않은 이 경험이 내게는 꽤 낯설게 다가왔다.

‘왜 그럴까?’ 하고 자문해 봤다.

아마도 환자의 생전에 환자와 가족들이 내게 해준 감사의 말들이 내 마음 한 구석에 켜켜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리라.

의학은 주로 치료법을 배우고 연구하는 학문이다.

의과대학에서는 학생들에게 이 질환이 왜 생겼고 어떻게 치료하면 나아질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지, 이 병에 걸린 환자들을 어떻게 하면 잘 돌아가실 수 있게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을 하도록 시키지는 않는다.

그래서 대부분의 의사들에게 끝까지 치료를 포기하지 않고 살릴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을 다한다는 것은 당위적인 선의 가치이고, 반면 멀쩡하게 걸어다니는 환자에게 죽음을 얘기하는 것은 의무를 다하지 못한 채 감성을 자극하는 것이라 생각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경우도 많다.

중요한 것은 본인의 노력 여부와는 별개로 의사들의 능력은 지극히 한정적이라는 것이다.

의과대학 학생 때는 책에 나오는 그 많은 내용만 잘 배우면 화타와 같은 명의가 될 것 같이 느껴지지만, 수련의와 전문의 과정을 통해 더 많은 경험을 쌓다 보면 환자의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 앞에 자신의 지식과 능력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절감하게 된다.

의료는 치료와 돌봄으로 구성되어 있다.

질병의 종류와 경중에 따라 그 비율은 달라지지만, 모든 환자는 병을 이겨내기 위해 치료와 돌봄을 함께 받아야 한다. 흔히 의사는 치료를 하고, 간호사는 돌봄을 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것은 직능의 속성상 그 역할이 강조된다는 것이지, 한쪽은 이것만 하고 다른 쪽은 저것만 하는 식은 아니다.

치료에 요구되는 자질은 두 가지다.

첫째로 의학에 대해 많이 알아야 한다.

의과대학 학생들은 엄청난 분량의 공부와 수많은 시험을 거쳐 의학 지식들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담는다.

똑똑하고 많이 아는 의사가 훌륭하다고 믿는 것은 예비의료인인 학생이나 일반인이나 매한가지다.

그러기에 학생들은 좋은 학점을 받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환자나 보호자는 의사 개인의 의료 지식을 검증할 수 있는 별다른 수단이 없기에 명문대 마크를 달고 있는 병원에는 똑똑하고 좋은 의사가 있다는 무의식적인 편견을 갖는다.

하지만 의사들은 안다,

학생들이 아무리 기억력이 좋아 세상 모든 의학 지식을 머리에 담고 있다고 한들 그것만으로는 환자 치료를 언감생심 꿈도 못 꾼다는 것을.

지식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두번째로 요구되는 치료적 자질인 경험과 기술이다.

경험과 기술을 쌓기 위한 수년간의 긴 수련 과정을 거치고서야 비로소 의과대학에서 배운 지식이 치료를 할 수 있는 의사의 능력으로 살아 움직이게 된다. 이는 의사뿐만 아니라 간호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돌봄에 필요한 능력은 무엇일까?

환자를 잘 돌보는 의사를 상상해보라. 무엇이 연상되는가?

아마 친절하고 마음 따뜻한 간호사, 나의 아픔에 잘 공감 해주는 의사, 푸근한 인상에 따뜻한 말을 건네는 의료진이 그려질 것이다.

의료진들도 이 사실을 잘 안다.

문제는 타인의 상황을 얼마나 어떻게 공감할지 알기가 어렵고, 환자들이 끊임없이 제기하는 불만에 끓어오르는 감정을 가라앉히고 말과 표정을 친절하게 유지하는 것이 마음처럼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의료진들이 표현해야 하는 감정과 실제 느끼는 감정 간에 괴리가 심해지면, 결국 탈진(burnout)해 업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된다.

그렇기에 돌봄에 필요한 덕목은 “환자를 친절히 대해야지”라는 의식적 의무감이 아니라, 자연스레 우러나오는 환자에 대한 연민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환자에 대한 연민의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마음이다.

이런 긍휼함을 바탕으로 의료진들이 환자의 고통에 함께 안타까워하면 그 자체가 공감이 되고, 친절이 된다.

의료진의 태도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에 환자와 보호자들은 의료진들에게 ‘돌봄’을 받고 있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고, 이것이 의료진과의 좋은 관계(rapport)로 이어진다.

예를 들자면 밤새 통증으로 시달린 환자가 힘들다고 호소할 때, 그들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밤에 많이 힘드셨겠네요’라는 말과 함께 환자의 손을 한 번 잡아주기만 해도 환자에게는 돌봄을 제공하는 것이다.

‘돌봄’은 의사가 의식적으로 베푸는 친절로 실현되는 게 아니라, 연민의 마음을 가진 의사의 사소한 행동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것이다.

치료의 목표는 질병의 쾌유이다.

하지만 절대 다수의 호스피스 환자는 쾌유를 기대하기 어렵고, 치료로만 따지면 최악의 결과인 죽음을 맞이해야만 한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환자들에게 제공되는 의료 서비스는 치료의 비중이 현격하게 줄어들기에, 돌봄이 그 빈자리를 충분히 메워야만 한다.

그래야만 의료진도 ‘최선을 다할’ 수 있고, 환자와 보호자도 의료진들에게 충분한 의료서비스를 받았다고 느낄 수 있다.

흔히들 호스피스의 또 다른 표현은 사랑이라고 얘기한다.

부모자식 간의 사랑과 연인 간의 사랑이 다르게 표현되듯이, 의료진의 환자에 대한 사랑은 연민의 마음으로 나타난다.

그런 연민의 마음 없이 단순 업무 혹은 자신의 성취감을 목적으로 죽음의 과정에 직면한 환자와 가족들을 대하는 것은 호스피스 환자의 특성상 어떠한 의료 서비스도 제공해주지 않는 것이나 다름 없다.

며칠 전 즈음에 돌아가신 환자가 사시던 시골 마을의 보건진료소 소장님을 회의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소장님이 대신 전해주는 환자 어머님의 감사 말씀에 내 가슴은 뭉클함과 보람으로 가득 찼다. 그 분이 내게 보여준 감사의 마음에 너무도 감사하고, 이로써 채워진 에너지가 호스피스 병동의 또 다른 누군가를 돌볼 수 있는 에너지가 되는 것에 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