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을 묻는 그대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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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19(금) 저는 매우 의미 있는 자리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한국호스피스협회 송미옥 회장님이 고(故) 유일한 박사님의 딸 유재라여사가 주는 제 21회 ‘유재라 봉사상’을 수
상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유일한 박사님에 대하여는 ‘전 재산을 사회에 기증하고 떠난 존경받는 기업인’정도로만 알고 있었
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확인된 자료를 통하여 알게 된 것은 그는 사업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민족
을 사랑한 애국자였습니다.
그는 “문명이 발달한 곳에서 많은 것을 배워서 조국에 이바지하라”는 아버지의 뜻과 주선에 따라 9살에 도미하
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웅지(雄志)를 품고 열심히 공부하면서 늘 조국을 잊지 않았습니다.
대학 경제학을 마치고 사업에 크게 성공한 그는, 귀국 후에는 유한중고등학교를 세워 학생전원을 장학생으로 공
부하게 하였고 유한전문대학도 설립하였습니다.
정부에서는 1970년에는 국민훈장모란장을, 1971년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과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
였습니다.
 
1971년 사망 시에는 성공한 기업가의 유언장이기에 사회의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그런데 유언 내용을 보고 사
람들이 놀랐습니다. “아들은 대학까지 공부를 했으니 자립해서 살고, 딸은 유한중고등학교 옆 땅을 줄 테니 절대
로 울타리를 치지 말고 잘 가꾸어서 학생들이 마음껏 들어와서 쉴 수 있도록 하며, 내 재산은 모두 복지사업과
교육 사업에 쓰라”하였다고 합니다.
그의 유지는 지금 장학사업. 교육지원사업. 청소년글짓기대회. 시상사업. 사회복지사업 등으로 확대되어 세상을
밝혀가고 있습니다.
그는 나눔의 실천을 통하여 ‘배분적 정의’를 실천한 사람이었습니다.
시상식에서 국민의례 후, 잠시 순국선열과 두 분에 대한 묵념의 시간이 있었는데 그 짧은 시간에 제 뇌리를 스쳐
가는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같이 나누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첫째: “한 알의 밀알이 썩으니 이렇게도 많은 열매를 거두는 구나”
그는 처음부터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환원해야 하며, 자신은 관리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확고한 청지기적 경영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30년대에 이미 주식을 사원들에게 나누어 주어 ‘사원지주제’를 시작하였다고 하니 엄청나게 열린 사고를 가진
분이였습니다.
그가 만일 “내가 이 회사를 만들기 위해서 어릴 때 부모를 떠나 외국엘 나가서 죽도록 고생해서 이만큼이라도 키
워놨으니 내가 주인인데 누가 뭐라고 하는가?” 하면서 소인배 정신으로 살아왔다면 유한양행 본사 로비에 사진
한 장 걸려 있는 정도로 그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한국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도 존경받는 기업인을 찾기 쉽지 않은 때에 진정
존경받는 기업인으로…
 
이런 숭고한 삶은 철저히 ‘자신을 죽이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곧 십자가 정신입니다. “나 하
나 죽어서 세상을 살리겠다”는 정신 말입니다.
 
그분의 위대함은 재산 헌납이 아닙니다. 큰 사업도 아닙니다.
장차 열매를 내다보며 사사로움을 포기할 줄 아는 혜안(慧眼)과 용기가 위대한 것입니다. 고인은 우리 사회에 선
듯 답(答)하기가 어려운 과제를 던져주고 가셨습니다.
 
둘째: “참으로 아름다운 세습도 있구나”
정원식 유한복지재단 이사장은 인사말에서 “봉사는 관념이 아니라 실천이며, 자기희생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숭고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숭고한 정신은 희생에서 입증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은 학교강단이나 교회강단에서 가르칠 수 있는 성격이 아닙니다. 강단 밑에 내려와서 삶으로 가르쳐
야 하는 영역입니다. 유재라 여사가 아버지에게 배운 것은 삶이었습니다. 그 역시 평생을 봉사하며 살았다고 합
니다. 사망할 시엔 평생 모은 재산과 물려받은 돈을 합친 돈 250여억 원을 역시 유한복지재단에 기증을 하였고,
그 기금으로 아버지 ‘유일한 상’에 이어서 여성을 위한 ‘유재라 봉사상’도 시작을 하게 된 것입니다.
늘 검소하게 살았던 그는 비행기를 타도 이코노믹좌석을 고집했고 숙소는 주로 유스호스텔(연수숙소) 같은 곳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경우를 볼 때마다 늘 “아버지보다도 자식들이 더 훌륭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아버지
는 아버지, 나는 어디까지 나”라고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대형교회 세습이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습도 세습 나름입니다. 자랑스런 세습도 있으니까요.
만일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의 자녀들이 순명(順命)이라 여기면서 “뒤를 따르겠다”고 했다면 그
것을 세습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요. 또한, 지금도 순교정신이 요구되는 힘없는 농촌교회나 만년 미자립 교회.
가난한 선교단체 사역자 자녀들이 역시 순명(順命)으로 생각하며 “뒤를 따르겠다”고 한다면 그것도 세습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요?
유재라씨의 경우에서 보듯이 아버지의 숭고한 정신을 그대로 물려받을 자녀가 있다면, 이런 세습은 하면 할수록
좋은 세습이 아닐까요. 이런 세습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 세상은 더 아름답고 행복한 세상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유재라 여사야 말로 참으로 아름다운 세습자이었습니다.
유재라 여사는 유일한 밀알이 남긴 자랑스러운 열매 중 하나였습니다.
 
그날 또 한 가지 매우 신선한 충격이 있었습니다.
송미옥 회장님께서는 상금 2,000만원을 호스피스 발전을 위하여 전액기증 하기로 하셨습니다. 늘 존경해오고 있
습니다만 새삼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지나가 버리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은 것이 인생입니다.
덧없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그래도 천상장부(天上帳簿)에는 뭔가를 흔적으로 남기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계
22: 12)
 
우리는 여건 상 그분들처럼 대인배로 살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소인배는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있는 자리에서 우리도 얼마든지 비슷한 성향(性向)의 삶을 살수가 있습니다.
‘뜻이 있으면 반드시 길이 있음’을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 2012. 10. 26 정기기도회 설교 요약)